봄이 도망가는 저녁이었다. 각자의 계절을 품은 사람들이 헤이그라운드 지하 1층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반가운 얼굴들이 늘어날수록 현장은 왁자지껄해졌다. 아는 사람이 없던 나까지도 밝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7시가 조금 넘자 불이 꺼졌고, 영화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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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에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마주한 영화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은 혼자 도보여행을 하고 있었다. 길고 긴 황무지, 그녀의 2배는 될 것 같은 배낭, 거칠다 못해 괴로운 숨소리. 부드러운 멜로디를 떠올리기엔 압도적인 삶의 무게였다. 그러나 셰릴의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녀의 안에서 끊임없이 노래했다. 셰릴은 걷는 내내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과거 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평생을 아내로 혹은 사랑이 넘치는 엄마로만 살다 간 어머니, 엄마의 죽음과 함께 무너진 셰릴 자신, 무분별한 성관계와 마약으로 죄책감을 표현하던-그 모든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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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다.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우리 각자는 기억의 어디쯤을 걷고 있는지, 말할 시간이었다. 삶의 고통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입을 열었다. 도보여행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힘듦을 극복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그러나 우리가 셰릴과 함께 걸은 길은-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셰릴만의 고통의 크기였다고 나눴다. 여자로 살아가면서, 엄마로 살아가면서 느낀 부당함을 말할 때는 모두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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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하는 셰릴이 남자를 마주치는 길목마다 우리는 왜 긴장해야 했는지, 왜 엄마들은 고통을 감내하며 사랑을 부어주는 역할로 규정되곤 하는지 함께 답답해했다. 자신이 부모님께 어떤 자녀였는지를 돌아보며 아파하는 분들도 계셨다. 소감을 공유하는 동안 선생님들께서 짓는 미소가 편안하게 다가왔다. 말과 말이 부딪히기보다는 서로의 마음과 상황에 대해, 삶에 대해 두 번 생각해보게 되는 대화. 시간은 아깝지 않게 흘러갔다.

 

저녁과 밤이 지났고 봄은 도망갔다. 봄비가 떠나가는 동안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 마치 손짓 같았다. 당신의 계절을 함께 걷겠다고, 이리 오라고 반가이 부르는 손짓.

 

글 : 김세희(일반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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